독서

김용규 작가의 [철학 카페에서 작가를 만나다 2 - 시간, 언어편]을 읽으며...

mood.er 2020. 1. 26.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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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 <반고흐, 영혼의 편지> 화가는 캔버스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세상에 태어나는 인간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벌거벗은 몸으로 , 자신들의 어머니에게서, 하루가 24시간이라는 공평한 시간입니다.



설 연휴를 맞이하여 우리에게 4일 동안의 휴일이 주어진 것-물론 개인의 상황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과 떡국 한 그릇을 먹고 나니 작년보다 한 살이 더 늘게 된 것도 모두 같습니다.



어제의 태양이 오늘 아침에도 뜨고, 오늘의 달이 내일 저녁에도 뜨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2019년이 2020년으로 바뀌면서 왜 한 살이 더 먹는 것인지,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건 저만의 생각일까요?



해가 바뀌어 나이 한 살을 더 먹고, 그렇게 10년, 20년이 흐르고, 점점 육체의 모습은 변화하지만, 마음과 정신은 언제나 청춘과 젊음에 머무르고 있는데, 우리의 육체는 점점 더 세월의 흔적이 쌓여만 갑니다.



그래서인지 나이 한 살이 주는 의미는 참으로 애뜻하고, 아쉽고,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젊음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이 켜켜이 쌓이면서 마음 한 켠이 쓸쓸하고, 외롭고, 공허함을 느끼게 됩니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젊음과 청춘이 사라지고, 육체는 쇠약해지며,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동안 조금의 저항도 할 수 없게 만드는 물리적 시간을 '크로노스'라고 합니다. 



이번에 읽게 된 김용규 작가의 [철학 카페에서 작가를 만나다 2 - 시간, 언어편]에서는 이렇게 세상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삼켜버리는 물리적 시간인 크로노스가 주는 파괴성과 허무함을 극복할 수 있는 핵심으로 과거, 현재, 미래가 존재하는 심리적 시간인 '카이로스'를 제시해주었습니다.



우리의 삶을 보다 더 의미있고 가치 있게 만들고, 시간의 파괴성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통해 인간이 더 이상 시간의 희생양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무척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모든 시간은 상처를 입히고 마지막에는 죽인다." 는 말은 너무도 적나라하게 들리지만, 결국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순응해야함을 느낄 때 덧없는 인생에 대한 쓸쓸함은 이루 말 할 수 없이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시간이여!

너는 청춘을 좀먹는 자, 거짓 즐거움의 못된 노예이며, 

슬픔을 구경하는 천박한 자, 죄악을 진 말이며, 

미덕의 올가미다.

너는 모든 것은 낳고, 또한 모든 존재하는 것을 소멸 시킨다.

-중략-

오만한 건축믈을 네 힘으로 폐허화하고

빛나는 황금 탑은 먼지로 더럽힌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시 <루크리스의 능욕>중에서-



크로노스(물리적 시간)는 살아있는 것부터 생명이 없는 모든 물체에 이르기까지, 소멸시키며, 폐허로 만들고, 무의미하고,  가치 없게 만들기 때문에, 삶에 드리워진 불안과 절망, 허무함과 끊임없이 싸워야만 합니다.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 위험과 그로 인한 공포가 엄습해오면, 내가 누구인지, 왜 살아야 하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고 불가항력적이며,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에 대해 속절없는 두려움에 떨어야 했고, 이런 것들을 신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도 문명이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인간의 두려움과 시간의 파괴성을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해법들이 제시되었고, 그 중 우리들에게 쾌락주의로 알려진 에피쿠로스는 단순히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육체적 쾌락을 추구하는 감각적 쾌락주의자들을 비판하였습니다.



에피쿠로스가 이야기하는 쾌락은 감각적 쾌감이 아닌, 고통의 감소로부터 오는 '마음의 평정'인 '아타락시아'였습니다. 그는 "철학의 임무는 신과 죽음 같은 초자연적 힘이 동반하는 불가항력적 공포에서 인간을 해방하는 것이다."라며,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위로의 복음'을 전해주었습니다.



"만일 신들이 존재한다면, 저 무한한 우주 어딘가에서 지복한 생활을 하고 있다. 신들은 인간을 괴롭히지도 않으며, 인간이 괴로워하는 것을 바라지도 않는다.  그리고 만일 신들이 존재한다면 우리들, 지상의 피조물보다는 행복한 삶을 산다는 점에서 신들인 것이다. 신들은 쾌락 속에서 살며 더할 나위 없는 지복 속에서 쉬고 있고, 다른 신이나 인간들 일에는 간섭하지 않는다."



또한 "모든 일은 그대가, 곧 오늘 여기에 살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그대가 행복하게 산다는데 달려 있다. 그대는 신이나 그의 사원을 위해, 국가나 강력한 문화를 위해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그대의 단 한 번뿐인 유일한 인생을 행복으로 가득 채우기 위해 존재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결국 불가항력적인 공포와 죽음의 위협에 대항하는 방법으로 '내세의 삶에 대한 희망'이 아닌 '현세의 삶에서 느끼는 행복', 즉 '지금', 현재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지금을 잡아라, 되도록 내일이라는 말은 최소한만 믿어라.'는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가 했던 마라 또한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이미 흘러가버려 존재하는 않는 과거로 인한 회한과 절망이나 신리구처럼 멀리 있어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떨쳐버릴 수 있도록 우리에게 방향을 제시해주었습니다. 



김용규 작가의 [철학 카페에서 작가를 만나다 2 - 시간, 언어편]을 읽는 동안, 시간에 굴복할 수 밖에 없는 인생의 덧없음에 대한 외로움과 허무함에 정면으로 맞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용기를 갖을 수 있었고, 현재,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에 대해 다시 한번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가장 무서워해야 할 악, 곧 죽음은 우리와는 아무 관계도 없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죽음은 존재하지 않고, 죽음이 찾아왔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살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 에피쿠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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