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고흐의 어머니 < 고통의 순간이 지나면 >

mood.er 2019. 12. 26.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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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살아생전에 남긴 900여점의 작품 중 딱 한 개의 작품만이 팔렸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만큼 오늘날 고흐의 작품은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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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 <반 고흐, 영혼의 편지> 화가는 캔버스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지난 시간에는 고흐와  동생 테오가 주고 받은 서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고, 오늘은 고흐의 처절했던 삶 속에서도 결코 꺼지지 않았던 그의 탁월한 예술적 재능과 감각을 물려주신 그의 어머니와 가족에 대한 발자취를 따라가보겠습니다.



고흐는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 준델트 (남부의 작은 시골 마을) 에서 목사였던 아버지와 예술적 재능이 뛰어났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프랑스의 오베르 쉬즈 우마즈에서 1890년 7월 29일 그의 짧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고흐는 급한 성격 만큼은 아버지를 닮았지만, 고흐의 서신에서 느낄 수 있는 글솜씨와 탁월한 예술적 감각과 재능은 모두 그의 어머니로부터 물려 받은 것이었습니다.


실제 그녀의 어머니 안나는 그림에 탁월한 솜씨가 있었고, 수예에도 조예가 깊어 뜨개질 클래스를 운영하며, 사람들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그렇듯이 그 누구보다도 자식들에 대한 사랑이 가득했고, 예술적 감각뿐 아니라, 강인하며,  실용을 중시하는 현명한 분이었습니다.


그러한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견뎌야 할 고통과 고난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큰아들 고흐의 죽음을 알게 되면 큰 충격을 받게 될 것을 염려하여 가족들은 그의 죽음을 어머니에게 알리지 않았고, 고흐의 사망 1년 후 둘째 아들 테오마저 병으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고흐의 막내동생은 군 복무 중 자살했으며, 고흐의 여동생마저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고 하니, 어머니의 고통과 상심이 얼마나 컸을까요?



아들 셋을 자신보다 먼저 보내야 했고, 딸마저 정신병을 앓았던 역경속에서 고흐의 그림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서서히 인정받기시작한 것을 보고는 1907년 조용히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평생동안 어머니는 먼저 떠난 자식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였으며, 결국 그녀의 기도와 사랑속에서 고흐는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며, 가장 위대한 불멸의 화가로 우리 곁을 지킬 수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고흐의 무덤


개신교 목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집안 분위기는 엄숙하고 종교적이었으며, 16살 무렵 미술품 딜러였던 삼촌의 소개로 헤이그의 구필 화랑에서 일하게 되었으며, 몇 년 후에는 그가 평생 동안 경제적, 정신적으로 의지했던 동생 테오도 같은 화랑에 취직하였습니다.


고흐는 구필 화랑의 런던과 파리 지점에서 근무하며 약 7년 동안 딜러로 활동하면서, 매일 수많은 화가의 다양한 그림을 접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예술적인 감각을 기르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특히 사실주의 화가 밀레와 근대 풍경화를 개척한 카미유 코로의 영향은 평생 동안 지속되었지만,  미술 작품이 상품처럼 취급되는 것을 싫어했던 반 고흐는 손님과 크게 다툰 사건으로 오랜 동안 일했던 직장에서 해고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1877년 목회자가 되려고 신학을 공부했으나 교수들과 의견 대립이 잦아 목회자 자격을 얻지 못하고, 벨기에 남부의 광산 지역으로 가서 선교 활동을 했으나,교회 측은 교리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이에 크게 상심한 그는 그림을 통해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고 싶다는 신념을 갖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고흐가 화가가 되기까지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국 그의 운명은 그를 화가의 길로 인도해주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세기의 명작이 된 고흐의 작품 세계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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